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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강의에서 해마다 진행하는 토론이 있다. 대선에 빗대어 ‘왕선(王選)’이라 가정하고, 광해군과 인조로 편을 나누어 왕선 토론회를 벌이는 것이다. 각 조별로 자기 왕의 치적을 자랑하고 상대편의 실정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정치·외교, 사회·경제, 후보 검증 등 세 분야로 나누어 토론을 진행한다. 청중석의 학생들을 대상으로는 누구 편을 들 것인지 미리 작성해오게 하기도 하고, 토론 후 생각이 바뀌었는지 등을 묻는 설문을 하기도 한다.
이번 학기엔 마침 대선을 몇주 앞둔 절묘한 시점에 토론 수업이 진행됐다. 그런데 올해 학생들의 토론을 듣다가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광해군 편이건 인조 편이건 비슷한 논리로 방어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인조 조에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인 것을 비판하자, 광해군 조에서 그것은 왕이 명한 게 아니라 아랫사람이 제멋대로 행한 것이라고 방어했다. 또 광해군 조에서 인조가 논공행상을 잘못해 결국 이괄의 난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냐고 비판하자, 인조 조에서 공신 책봉은 아랫사람들이 한 것이라고 했다. 두 조가 똑같은 방어 논리를 펴는 것을 보며, 이것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논리는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문제가 있다. 일단 작게는 왕조 사회의 구동 원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문제다. 왕조 사회는 기본적으로 임금이 법체계 위에 있으므로 그 명령이 절대적이고, 그 권력은 자질이나 능력이 아니라 혈통으로 세습된다. 그런 사회에서 영창대군 같은 왕위 계승권자를 죽이는 일이나 반정 후 공신을 책봉하는 일에 국왕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것은 그 구동 원리를 모른다는 의미다. 혹은 조상님이 기록에 남긴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는, 매우 순진한 이해다.
이 정도는 역사상에 대한 오해 정도로 끝날 수 있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저 정도의 논리로 지도자의 실정이 방어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지도자, 특히 최종 결정권자가 하는 일은 사실 정책 방향과 의지를 제시하고 그에 적합한 인재를 적합한 자리에 임명하는 것뿐이다. 정도전은 경복궁 근정전의 기문에서 임금이 부지런한 것은 중요하나 쓸데없이 부지런하면 안 된다며, ‘어진 이 구하는 데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임명하는 데 빨라야 한다’는 옛 유학자의 말을 인용했다. 그만큼 인사가 임금의 가장 중요한 일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아랫사람의 실수’란 결국 그런 사람을 잘못 임명해 조직을 엉망으로 만든 지도자의 책임에 지나지 않는다. ‘왕은 잘못이 없고 아랫사람이 잘못했다’는 말 자체는 제대로 된 방어 논리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도리어 이는 그런 문제 있는 사람을 등용한 지도자 자신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에 불과하다.
이렇게 얘기하면 아마도 역사상, 그리고 현실의 크고 작은 조직들의 수많은 지도자들은 억울할 것이다. 실제로 실무자의 실수로 발생한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그것을 아랫사람의 잘못으로 돌리지 않는 것을 암묵적 규칙이나 미덕으로 여겨온 것은 지도자의 책임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랫사람의 실수’라는 말을 우리 사회에서 무심히 수용하면서, 자라나는 학생들까지 그것이 지도자가 댈 만한 방어 논리라고 착각하게 된 듯하다. 이런 변명은 지도자를 무책임하게 함으로써, 조직과 공동체를 좀먹게 한다. 근래 곳곳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실무진의 실수를 운운하는 같잖은 사과문이 나오는 것은 이런 문화 때문이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정치의 쇄신을 원하는 이 시점,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원칙 하나를 다시 세우면 좋겠다. ‘지도자는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설사 그런 변명을 하더라도 주변에서 받아써 주지 않는다.’ 사회의 기강은 이런 데에서부터 서야 할 것이다.